1900년 봄, 서울 정동의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방유룡 신부는
어릴 적부터 깊은 신앙 안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조부에게 배운 한학의 영향으로 많은 한문 서적을 통독하여 동양 사상의 뿌리를 키웠다.
신학교 시절 "오늘부터 나는 성인이 된다“는 회심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사제서품 후에는, 앞서가는 사목으로 본당 공동체 화합을 이끌며 특히 남녀 청년 학생을 모아 생동감 넘치는 교회를 만드는데 노력했다.
해방을 맞이한 방유룡 신부는 겨레의 성화와 복음화를 위해, 순교자들의 정신을 잇고 한국인 수도자 양성과 한국인의 심성에 맞는 한국순교복자수녀회(1946),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1953), 한국순교복자빨마수녀회(1962)를 창설하였다. 또한 그리스도교 영성을 동양 문화의 바탕 위에서 한국인의 정서와 언어로 담아냄으로써 한국 천주교회 토착화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오직 하느님 사랑을 찾으며, “사랑에서 태어나고, 사랑 위해 생겼으니, 우리 본(本)은 사랑이오, 목적도 사명도 사랑일세”라고 노래하며 선종(1986)하는 날까지 일상의 성화를 통한 완덕의 길을 걸었다.
사목자이고, 수도회 창설자이며 수도자였던 방유룡 신부의 성덕과 명성은, 보편교회의 영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어, 서울대교구는 2023년 3월에 방유룡 신부의 시복시성 추진을 선언했다.